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고리오 16세 (문단 편집) == 재위기간 == 그 역시 이 시기의 [[교황]]들처럼 보수 반동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는데, 이는 보수주의의 물결이 불던 [[유럽]]의 열강들조차도 비판할 정도로 심각했다. [[철도]]를 '지옥의 길'이라 부르면서 [[교황령]] 전역에서 철도 건설을 금했으며, 이 무렵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[[이탈리아 통일]] 운동을 [[오스트리아 제국]]의 힘을 빌려 강하게 진압했다. 언론의 자유와 [[정교분리]]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단속당했다. 교황령 외부에서도 그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. 1832년에 [[러시아 제국]]에 맞서 봉기한 [[폴란드인]][* [[폴란드]]는 [[폴란드 왕국]]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[[가톨릭]] 국가였다.]들이 가혹하게 진압되었지만, 교황은 가톨릭 신자들을 지지하기는커녕 반란을 규탄하는 칙서를 발표했다. 당시는 프랑스의 자유주의자 [[사제]]들을 중심으로 "교회는 압제자가 아닌 대중과 손을 잡아야 한다"는 생각이 퍼지고 있었는데, 그레고리오 16세와 교황령은 이를 철저하게 비판했다. 비록 그레고리오 16세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면모로 교황령의 진보를 막았지만, 고전적인 교황으로서의 역할은 충실했다. [[노예]] 무역을 맹비난했으며[* 교황들은 노예 무역이 시작된 이래 지속적으로 노예 무역을 비판해 왔다. 왜냐하면 [[야훼|하느님]]의 자녀는 다 평등하니까.], 해외[[선교]]에 관심을 보여 [[교황청]]을 중심으로 한 선교사업을 재조직했고, 전 세계에 걸쳐 70여 개의 새로운 [[교구]]를 건설했다. [[한국 가톨릭]]도 그 은혜를 받은 곳 중 하나로, '''1831년 9월 9일 [[천주교 서울대교구|조선대목구]]를 설정하고 [[파리 외방전교회]]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'''했으며[*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[[조선]]에 입국하지는 못한 채 [[만주]]에서 사망해, [[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|앵베르 주교]]가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었다.], [[캐나다]]와 [[미국]]에 각각 4개와 10개의 [[교구]]를 설정했다. 사실 선대 교황인 [[비오 6세]] 때, 조선에 가톨릭이 자생했다는 기적같은 소식이 교황청에 전해졌지만 당시 비오 6세는 [[프랑스]]에 유배된 상태라 무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망했기 때문에, 그 역할을 그레고리오 16세가 맡았던 것. [[비오 6세]]는 죽기 전 당시 추기경이던 바르톨로메오 추기경(= 그레고리오 16세)에게 비상금을 털어서 그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. 이와 함께 100여년 뒤 조선인 성인이 될 [[정하상]] 바오로가 목숨을 걸고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문(편지)을 써서 로마 교황청까지 전달한 것도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. 1825년에 쓰여졌으나 1827년에야 교황청으로 어렵사리 전해진 이 편지를 읽은 그레고리오 16세는 "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구나"라고 말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. [[파리의 성모]]로 인해 생겨난 통칭 기적의 패를 자기 책상에 있는 [[십자가]] 아래에 뒀다고 전해진다. 1836년에는 [[바티칸 미술관]] 내에 [[에트루리아]] 미술관과 [[이집트]] 미술관을 설립했으며, [[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]]에도 [[그리스도교]] 미술관을 세워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